[TE머묾] 지혜 지킴이로서의 보안
- 지난 '반지성주의' 어쩌구 글에 이어...
- 보안은 사회 지지하는 마지막 보루일 수 있어
- 숨어 있는 보안의 역할을 알고 담당하는 게 참 재미
지난 [TE머묾]을 통해 ‘반지성주의’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써놓고는 혼자 민망함에 끙끙댔다. 이 시대 대표 지성인인 것도 아닌데, 흔한 시골 동네 ‘듣보잡’ 일뿐인 자가 어쩌자고 그런 글을 써재꼈느냐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도대체 지성이란 무엇일까’, 더 나아가 ‘지혜라는 건 무엇일까’하는 고민에 빠졌다. 예상치 않게 내가 보안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 분야에서 떠나지 못해 계속 머물러 있는 이유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예의 바르게 Disclaimer부터
‘지혜’를 정의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매우 많은 반대에 부딪힐 것을 각오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필자는 그 험난한 길을 갈 용기가 없다. 그래서 살짝 비껴가고자 한다. 이 지면에서는 어느 시대에나 통용될 수 있는 ‘지혜’가 아니라, 2025년이라는 시점에만 수긍이 갈 만한 ‘지혜’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물론 시기를 한정 짓는다고 해서 수많은 ‘지혜’의 정의가 하나로 모아지는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테다. 난 그저 그 수많은 정의 중 하나의 후보만 슬쩍 올릴 뿐이다.
주변을 관찰했을 때 뭔가 많이 알고 있는 사람, 모든 질문에 척척 답할 수 있는 사람을 두고 흔히들 지혜롭다고 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이 경우는 ‘지식’이 많은 것이지 ‘지혜롭다’고 하기까지는 2% 부족하다. 물론 많은 지식을 통해 지혜가 축적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반대로 지식만 많지 실제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나 복잡한 당면과제를 풀어가야 할 때 범인과 똑같이 허둥지둥 대는 인간들도 수두룩하다. 대한민국 대표 똑똑이들이 모여 있는 국회만 봐도 지식과 지혜가 같지 않음은 충분히 증명된다. 아, 백악관과 캐피톨도 마찬가지고 교수들의 세계 역시 그렇다.
최첨단 지식을 줄줄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예술 문화사 중요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암송하는 것도 아닌데, 돌아서면 감탄 나올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들을 겪어본 일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던 시골의 한 이름 없는 장로분의 경험담이나, 그 특유의 순수함으로 문제의 본질을 단번에 꿰뚫는 어린아이의 지나가는 한 마디를 듣고 머리가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봤다면 당신은 지혜의 편린을 맛본 것이다. 그런 비슷한 느낌을 빈도 높게 주는 인물이 생각난다면 - 그 사람이 성인군자는 아닐지라도 - 한 번 인상을 떠올려보라. 어떤 느낌인가? 필자는 ‘균형감’이 먼저 떠오른다.
밸런스?
‘균형감’이라 함은 ‘평온함’ 일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한 분야에서 특출 난 성공을 거두었다거나 세상에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을지라도, 자기 삶의 모든 면을 모나지 않게 관리한다. 그냥 평범한 회사 다니는 동네 아저씨일 뿐인데, 매달 내지 못하는 고지서가 쌓이는 일 없고, 가족들 중 특별히 아픈 사람 없고, 차가 자주 고장 나거나 이웃과 다툼에 휘말려 드는 일을 만들지 않아서 늘 평화로운 느낌이다. 대한민국 모두가 알 정도로 자기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인데, 그 일에 집중하느라 가족에 소홀해 아이들이 엇나가거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한 배우자가 도박에 빠져드는 시나리오, 이거 소설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경우 성공은 했지만 균형감은 갖추지 못한 거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지혜의 아우라가 풍기지 않는다.
혹자는 고지서 쌓일 정도로 가난하고, 가족 중 누군가 병에 걸리고, 차가 고장 나고, 성질 더러운 이웃을 만나는 건 다 운의 영역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경제관념이 희박하면 고지서 쌓일 수 있고, 평소 가족들의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는 아버지라면 큰 병을 초래할 확률을 낮출 수 있다. 자동차도 적당히 관리하면 잔고장 줄이는 게 가능하고, 이웃과의 관계라는 것도 일정 선까지는 제어할 수 있다. 우리 삶에 불가항력적인 면모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이전에 관리로 위험을 최소화시킬 여지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을 고루 잘 치리 할 수 있는 사람, 즉 주변에도 평온의 영향력을 미리미리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움’에 어울린다고(2025년 현시점 기준!) 생각한다.
그렇다고 ‘지혜’가 곧 ‘균형감’이라는 건 아니다. 균형감은 지혜가 세상에 드러날 때 나타나는 산물 중 하나일 뿐, 그 자체로 지혜는 아니다. 다만 균형감이라는 키워드가 있어, ‘지혜란 무엇일까?’라는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질문을 ‘어떻게 균형감을 갖출 수 있을까?’로 구체화시킬 순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의 힌트는 사실 위에 이미 언급됐다. 예를 들어 고지서가 쌓이지 않게 하려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게 경제관념이라 했었다. 내가 버는 수준을 알고, 쓸 수준을 정해, 그걸 생활 속에서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바깥에서 돈을 버니까 집에서는 쉬어도 된다며 잠만 자는 아버지 혹은 오밤중에만 집에 들어가는 아버지는 사실 일 속으로 도망가는 것일 때가 많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익숙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가족 돌봄이라는 낯선 영역으로 진입할 마음부터 부재한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일을 핑계 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밸런스의 배후 세력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균형감 있게 살게 하는가? ‘절제’다. 쓰고 싶은 걸 마음대로 쓰지 않는 절제가 지혜이고, 그 지혜가 경제적 균형을 삶에 일궈낸다. 일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 욕구를 잘라내는 절제가 지혜이고, 그 지혜가 가족들의 신체와 마음을 건강하게 지켜낼 확률을 높인다. 모처럼 쉬는 날 몸을 일으켜 자동차 한 번 정비소에 맡기는 것도 절제이자 지혜이고, 낯가림 심한 나의 성향을 잠깐 누그러트리는 것도 절제이고, 그 지혜가 잠재적으로 미치광이일 수 있었던 이웃을 친구로 만들 수도 있다.
지난번에도 썼지만 ‘반지성주의’가 만연하다.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게 그 이유라 했었다. 하지만 정말 부끄러움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도록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진 걸까? 저 깊은 곳에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마음이 일지만, 그걸 인정하지 못해 발끈하는 건 아닐까? 즉, 우리는 부끄러움 자체를 거세한 게 아니라 그 충동적인 반응을 절제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분노와 격양만 절제할 줄 안다면, 그래서 배울 걸 배웠을 때의 기쁨만 솎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지혜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이 이야기를 왜 여기서...
그런 맥락에서 필자는 정보보안이라는 분야가 지혜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게 ‘절제’이기 때문이다. IT 신기술이 등장할 때, 새롭고 놀라운 애플리케이션이 유행할 때, 가장 먼저 찬물을 끼얹는 게 누군가? 보안 담당자들이다. “신기하고 놀랍고 새롭다고요? 그럼, 안전한가요?” 우리는 ‘안 돼’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안전한가’라고 물을 뿐인데, 사람들이 이를 ‘안 돼’로 이해해서 문제 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발전의 이름을 쓴 방종이 될 수 있을 뻔한 것들을 틀어막는 역할을 꾸준히 담당하고 있다.
성과가 없지 않았다. 챗GPT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을 때, 그래서 너도 나도 이 신기한 기술에 말을 거느라 똥오줌 구분 못하고 이 정보 저 정보 마구 프롬프트 창에 넣고 있을 때, 냉정을 찾게 해 준 것도 보안이었다. ‘그 정보 넣지 마오!’라고 외치는 보안의 목소리가 있어서 삼성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정신 차려 무절제한 정보 유출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코로나로 줌의 주가가 고공행진을 할 때 공격자들의 각종 창의적인 공략법을 낱낱이 드러낸 것도 보안이었다. 그러면서 그저 화면에 우리 부하직원 얼굴만 보이면 안심했던 관리자들이 좀 더 꼼꼼히 다른 것들도 챙길 수 있었다.
IT 기술만 다루는 게 아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도 활동한다. 소셜미디어에 악성 콘텐츠들이 돌고 있어 청소년들이 너무나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걸 끊임없이 세상에 잔소리한 것도 보안이고, 드디어 서방 국가들에서부터 소셜미디어 단속이 가시화되고 있다. 선거 시즌마다 소리 소문 없이 눈 부릅뜨고 관련 시스템을 지키는 것도 보안이고, 여태까지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보존하는 데에 일조할 뿐만 아니라 성공까지 하고 있다. 그저 ‘절제’만 외쳤을 뿐인데, 그게 즐겨 들을만한 소리가 아니라 배척되기도 했는데, 어찌 됐든 이 세상은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다. 지혜라는 지지대가 툭 빠지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어느 방향, 어떤 속도로 낙하할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 애플리케이션이나 설치하면 안 돼요. 아무 네트워크에 연결하면 안 돼요. 아무 브라우저나 쓰면 안 되고, 아무렇게나 써도 안 돼요. 비밀번호는 성의 있게 설정하시고, 중요한 계정은 이중, 삼중으로 보호하세요... 우리의 잔소리는 ‘절제’로 모아진다. “사이버 공간 내에서 절제하며 사세요. 그게 지혜예요.” 모두가 자기만의 파편화된 정의로 살아가는 때에, 그래서 잔소리와 지적에 불같이만 반응하는 때에, 보안은 시대에 어울리는 지혜를 중심에 심고 꿋꿋하게 외친다. 지혜로우시라고. 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 계정(www.brunch.co.kr/@anotherphase)을 통해 연재되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많은 소통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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