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머묾] 첨단 기술들의 흥망성쇠
오래된 이름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델몬트(Del Monte)’와 ‘아타리 2600(Atari 2600)’이다. 전자는 1886년에 창립된, 통조림 위주의 식품 회사이고, 후자는 70년대에 탄생해 80년대까지 게이머들을 열광시켰던 유명 비디오 게임 브랜드이다. 델몬트는 파산했고, 아타리 2600은 2025년 기준 최첨단으로 분류될 만한 기술과의 시합에서 연승을 거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오렌지를 영어로 하면 델몬트인가요?”
그 옛날 델몬트는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브랜드였다. 지금도 탄탄해 보이는 델몬트 유리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는 어느 집에서나 손님맞이용으로 비축해 두고 있었다. 주스를 다 먹으면 그 병에 보리차를 담아 보관했었다. 이게 얼마나 편만한 일이었던지, 오렌지를 영어로 하면 델몬트인 줄 아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델몬트는 당시 최첨단 기술에서부터 탄생한 기업이다. 19세기 초에 발명된 통조림 가공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음식을 최대한 오래 보관했다가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이 기술은, 한창 전쟁을 치르던 서방인들 사이에서 혁신 그 자체였고, 델몬트는 그런 흐름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신기술을 적절한 시기에 받아들이고 상업화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누구나 쓸 수 있는 기막힌 아이템을 개발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으로 흥한 회사, 시대의 흐름으로 망했다. 냉장고가 없어 음식을 효과적으로 보관할 수 없었던 때 등장한 통조림이니, 흥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겠다. 135년이 흘렀고, 사람들은 더 이상 음식 보관에 고민하지 않게 됐다. 집집마다 냉장고가 한두 개씩 있고, 스마트폰만 몇 번 조작하면 싱싱한 재료들이 문 앞에까지 오는 때이니 말이다. 그러면서 ‘웰빙’과 ‘건강식’이 화두가 되고 있고, 방부제 가득한 통조림 제품은 기피되기 시작했다.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기술이라는 것도 쇠퇴의 때를 맞닥트릴 수밖에 없다. 통조림 안에 그 어떤 음식을 넣는다 해도, 결국 통조림 가공 기술이라는 범위 안에서의 변주일 뿐, 기술 혁신이 될 수는 없다. 델몬트는 깡통 바깥으로 나갔어야 했다. 건강식의 흐름을 타는 뭔가를 세상에 내놓아야 했다. 물론 내부에서의 고민과 시도가 적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소비자인 우리가 본 결과물은 없었다. 그리고 어제 델몬트는 미국서 파산 신청을 했다. 회사의 정체성과 중흥의 요인이 특정 기술이라면, 그 기술의 수명 자체가 기업의 리스크가 된다. 델몬트가 몰랐을 리 없지만.
“젊은이, 말발이 좋다지?”
얼마 전 링크드인에 로버트 카루소(Robert Caruso)라는 IT 전문가가 흥미로운 게시글을 올렸다. 아타리 2600이라는 고전 게임 기계의 체스 엔진과 챗GPT를 싸우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아타리 2600은 “1.19 MHz 속도의 CPU를 가진 8비트 엔진”이었다. 인공지능을 떠받치고 있는 현대의 컴퓨팅 파워와는 그 어떤 면에서도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 낡고 늙은 기술이었던 것이다. 물론 70년대 당시에는 모든 어린이들(안녕하세요, 어르신들, 여기는 미래예요!)을 흥분시킨 최첨단 기술이었지만 말이다.
카루소 본인도 챗GPT라는 젊은이가 아타리 노인을 가볍게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합을 거듭해도 챗GPT는 아타리를 전혀 위협하지 못했다고 한다. 말발 좋은 챗GPT는 핑계를 댔다. 아타리 식 체스 말 표현이 너무 추상적이라 알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표준 그림으로 바꿔줬지만 챗GPT의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챗GPT는 “이 시합하지 말걸...”이라는 컴퓨터 답지 않은 언어 표현을 통해 항복 의사를 표했다고 카루소는 글을 마무리했다.
‘70년대 게임기가 인공지능을 이겼다’는 식으로 보면 놀라운 일이지만(아마, 그래서 지금 화제가 되는 것이리라), 사실 당연한 결과다. 아타리 2600 체스 엔진은 오로지 체스만을 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챗GPT는 기계가 사람처럼 말하도록 개발된 기술이기 때문이다. 제작된 목적에 따라 아타리는 아타리의 강점 - 체스에 대한 이해력 - 을 드러냈고, 챗GPT는 챗GPT의 강점 - 자연어와 비슷한 표현력 - 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 과정에 ‘승패’라는 자극적인 현상이 나타났을 뿐이다.
아마 챗GPT에 수많은 체스 게임 데이터를 입력하면 아타리 따위, 사뿐히 즈려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첨단 기술이라고 모든 방면에서 두루 뛰어나지 않다. 실험에 참가한 챗GPT는 체스가 아니라 인간 언어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기술을 어디에 집중시키느냐,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키느냐가, 최첨단이냐 아니냐 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기술 개발에 참여하지 못하고 소비자로서 접하기만 하는 일반 사용자라면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비자는 지갑을 여는 사람이고, ‘최첨단’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오해해 엉뚱한 곳에 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을 구매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면 큰돈을 쓰고도 창고 속 물건보다 못한 효율을 낼 수도 있다.
보안, 어느덧 오래된 이름
정보보안을 두고 새로운 기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오래된 기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보보안은 비교적 새로운 분야’라는 말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 꾸준히 나왔었다. 십수 년을 짧게 보면 신기술이 되고, 길게 보면 낡은 기술이 된다. 근데, 정말 이게 ‘기간’에만 국한된 말일까?
필자라면 ‘새롭지 않다’에 한 표를 행사하겠다. 왜냐하면 ‘해킹은 위험하다’, ‘정보보안은 중요하다’는 인식이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퍼지다 못해 모두에게 지겨운 격언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정보보안의 개념들은 더 이상 새롭지 않고, 따라서 누구의 고막도 의미 있게 울리지 않는다. 그게 보안과 IT 담당자들이 커버해야 할 사용자들의 현주소인데, 우리끼리 ‘정보보안은 비교적 새 분야’라고 주장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근 SKT와 예스24 사태가 연이어 터지면서 보안 담당자들의 마음이 들뜨고 있다. 이 사건이 일반 사용자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겠다는 희망의 불길을 지피는 중이기 때문이다. 철벽 같던 사용자들의 고막이 드디어 좀 얇아지려나, 하는 기대감이 웅성웅성하다. 기술 분야를 관찰하는 기자로서, 절로 그 마음에 물들기도 하는데, 뒤돌아서면 ‘과연 그럴까’하는 회의감이 미리 들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부족한 게 ‘굵직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보안 사건들이야, 검색만 살짝 해봐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게다가 사이버 범죄 산업은 매일같이 흥하고 있다. 이번 주 마스터카드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규모 면에서 사이버 범죄 산업을 이길 게 미국과 중국, 딱 두 곳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나라의 GDP보다 범죄자들이 챙기는 돈이 더 많다는 건데, 이건 그 산업의 미래를 일구는 중요한 토양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부터 육성되는 사이버 범죄자들은 꽤나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자라날 것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끊임없는 공급으로 계속 새로워지고 있는데, 사용자 참여시키지 못하고, 굵은 사건들에 기뻐하는 정보보안은 계속 낡아지고 있다. 캔 안에 든 델몬트 과일들처럼.
고민이 머무르는 지점
델몬트의 하향세에서 얻을 교훈은 분명하다. 기술의 라이프사이클을 이해해야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아타리의 뜻밖의 승리에서 얻을 교훈 역시 분명하다. 하나에 집중된 기술력은, 때론 최첨단 기술을 이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술의 측면에서 정보보안은, 해킹 공격 기술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기는 하나, 그것이 깡통 밖으로까지 나가게 하는 것인지, 깡통 안에서 과일 종류만 바꾸는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해커들이 새로운 공격 기술을 들고 나와야 그것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기술이 발전하는 지금의 ‘보안 기술 라이프사이클’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공격을 미리 방어한다는 건 도저히 정착할 수 없는 문화일까. 어쩌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우리는 계속 찾고 있는 건지도, 혹은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정보보안’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운더’가 되려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쉽게 말해 ‘정보 보안 담당자’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든 종류의 공격을 다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압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담당자를 고용한 회사도, 담당자 자신도. ‘IT 기술’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모든 하위 기술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시대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안이라는 분야도 좀 더 세분화되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타리처럼 체스 한 우물만 파서 수십 년 후에 태어난 쌩쌩한 젊은이도 이길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