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머묾] 숙원과 수명 사이에서

[TE머묾] 숙원과 수명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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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Pick
- 컴퓨터 활용 스킬을 해방시키는 건 키보드 아닐까
- 새로운 기술들의 폭발적 증가, 어쩌면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 의심하고 의심하는 것, 디지털 시대의 서바이벌 가이드

80년대 중반이 막 지나 서울올림픽에 대한 기대가 팽배할 때였다. 옆집 친구 PC로 '페르시아 왕자'라는 게임을 해본 후, 컴퓨터는 나의 숙원이 됐다. 하지만 바나나조차 귀하던 시절, 아무리 아이가 졸라도 컴퓨터라는 기계를 함부로 들일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형편을 이유로 대며 컴퓨터를 영원히 포기하게 하는 대신 '숙련도'라는 키워드를 들고 거래를 시도했다. 컴퓨터를 잘 다루려면 타자를 잘 쳐야 하는데, 너는 지금 그게 아니지 않냐고, 타이프라이터를 하나 구해올 테니 그것부터 연습하라고.

그런 이유로 컴퓨터보다 훨씬 작지만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기계 하나가 동선 겹치는 마루 한 구석을 차지했다. 타자만 능숙하게 친다면 컴퓨터 구매를 고려해보겠다는 부모님의 약속이 집안을 돌아다닐 때마다 보였다. 결혼하기 전 유명 기업에서 비서일을 하시던 어머니가 우리의 시범조교였다. 그 손끝에서부터 퍼지는 경쾌한 타자 소리와, 이따금씩 종이를 갈아끼우고 롤러를 드르륵 굴리는 소리가 박자 맞추듯 차례차례 나기 시작하면, 나와 동생은 우두커니 서서 그 신기술을 구경하기만 했다. 그많은 키들과 기호들에 압도되었던 나는, 숙원도 잊은 채 신비로웠던 능숙함 자체에 매료됐다. 옆집 친구도 페르시아 왕자를 그렇게까지 잘 다루진 못했었다.

그럼에도 매료는 매료일뿐, 초등학생의 숙원은 가벼웠다. 타자기를 빠르게 정복해 반드시 컴퓨터를 갖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어머니의 타자 속도보다 빠르게 흐려졌다.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양손을 위치에 맞게 제대로 놓는 것은 쉬웠다. 놓인 손 그대로 ㅁㄴㅇㄹ ㅓㅏㅣ;는 칠 수 있게 됐다. 손가락 위치를 그대로 잡은 채 한칸씩만 올리거나 내리면 더 많은 글자를 칠 수 있다는 것도 이론상은 이해했다. 손을 보고 치면 이론처럼 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종이에 찍히고 있는 글자를 본 채로 손을 놀리는 건 영 되지 않았다. 초등생 세상에는 마음속 소원을 천천히 이뤄가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고, 결국 타자기는 방치됐다. 

결과적으로는 잘 한 일이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타이핑은 어차피 익혀질 기술이었고, 바깥에서 뛰어놀 시간이나 기회는 활자봉 앞 백지처럼 내 인생에서 점차 사라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숙원이 방치된 그 몇 년 동안 타이프라이터라는 기술 자체의 수명이 다하기도 했다. 이미 그 때도 오래된 기술이었던 타이프라이터는 얼마 가지 않아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에 밀려 완전히 자리를 잃고 만 것이다. 그 경쾌했던 기계들은, 고대 마야인들처럼 신비로울 정도로 빠르고 조용하게 사라졌다. 그런 시대의 흐름에 못 이긴 부모님은 페르시아 왕자가 듀크뉴컴3D로 변모하던 시기에 결국 큰 결단을 하시게 됐다. 내 오랜 숙원은, 한 기술의 수명이 다하면서 저절로 이뤄졌다. 

숙원을 이루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가장 멋있는 건 넘어져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시도한 끝에 얻어내는, '쟁취'일 것이다. 가장 멋대가리 없는 건 시간이 흘러가면서 혹은 시대가 바뀌면서 싱겁게 이뤄지는 것 아닐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스스로를 고취시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컴퓨터라는 것에 도취되지도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좋은 것(이를 테면 타이핑 기술)을 섭취한 것도 아니고, 따라서 그 어떤 자취도 남기지 못한 성취. 이건 그냥 '수취'다. 주어졌으니까 얻어내는 것 말이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 그리고 내게 주어진 수명의 일부를 별 생각 없이 썼을 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소원은 거기에 실제하는 모습으로, 마치 해프닝처럼, 벌어져 있었다.

'수치'와 비슷한 그 단어 외 그 어떤 '취'도 나와 어울리지 않았기에 처음 컴퓨터 화면을 켜고, 부모님 앞에서 난 독수리 타법을 선보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타자기 연습에 게을렀던 것을 숨길 재간이 없었다. 이제부터 배워나가야지, 라는 말은 당연하게도 부모님의 마음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질책이 이어졌다. 타자기까지 사다줬더니 연습 안 하고 뭐했냐, 그 긴 세월 동안 타자기도 못 익혔으면서 컴퓨터를 이제부터 배우면 언제 써먹느냐, 마치 컴퓨팅 시대가 당도하고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변할 것을 미리 아시기라도 한 듯이 부모님은 혀를 차셨다. 그런 시대의 편린조차 느끼지 못했던 나만 느긋했다.

느긋하게 도스를 익히고, 느긋하게 게임들을 설치했다. 도스는 기계와 내가 키보드를 써서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체제였다. 도스를 알아가면서, 타이핑은 저절로 늘었다. 당시의 게임은 지금처럼 하드웨어와의 호환성이 폭넓지 않았다. 설치만 하면 자동으로 하드웨어를 탐지해 알아서 설정을 바꿔주는 그런 친절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아닌 것이 대부분이었다. 각종 설정파일을 열어 특정 매개변수들을 바꿔주는 작업을 일일이 해야 했다. 타이핑이 저절로 늘었다. 타이핑이 전제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어야 할 컴퓨터는, 먼저 내 소유가 됨으로써 그 전제를 성립시켰다. 그러면서 타자 잘 치는 최첨단 학생으로 나를 키우고 싶어하셨던 부모님의 숙원도 해결됐다. 타자기의 수명이 다하니, 또 다른 숙원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다가 도스가 운명하셨다. 윈도라는, 두 눈 휘둥그레질 만한 그래픽 기반 OS가 등장하면서였다. 3.1버전은 도스와 공존할 수 있었는데, 곧이어 윈도 95가 나왔다. 그 윈도 95도 한동안은 도스와 같이 썼다. 아직 도스에서만 잘 돌아가고 윈도 95와는 호환되지 않는 프로그램들이 적잖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프로그램들도 차례로 소임을 마치고 망각의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사용자들은 도스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강력한 윈도 95용 대체제를 어렵지 않게 찾아내, 드디어는 도스로 굳이 부팅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됐다. 컴퓨터 켜자마자 윈도로 진입해 윈도에서 원하는 작업을 하다가 윈도를 종료함으로써 (당시는 윈도의 지엄하신 허락 하에) 컴퓨터를 꺼도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면서 컴퓨터와 사람이 대화라는 것을 할 때 ‘마우스’라는 도구가 필수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 Cd..이나 dir /w와 같은 명령어를 순식간에 타이핑해 원하는 프로그램 디렉토리로 찾아 들어가 실행파일 이름을 다라락 입력하는 절차가 없어졌다. 컴퓨터 업계의 전설과 같은 사람들이 당시 전혀 필요없는 부속품 정도로 평가절하를 마지않았던 마우스는 그 모든 타이핑을 생략시켰다. 우리는 클릭과 더블클릭, 우클릭을 익혔다. 글자만 떠 있는 검은 화면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을 입력했던 우중충한 geek들은, 모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윈도란 푸른 바다에서 마우스로 자맥질을 함으로써 멋진 놈들로 거듭났다. 모두가 컴퓨터를 거부감 없이 만지며 살기 시작했다.

마우스의 동선은 우아했다. 내 손 안에서 화면의 기계적 좌표들이 정복됐다. 그러나 타이핑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더블클릭으로 연 넷스케이프나 워드에서 우리는 여전히 타이핑을 했으니까. 마우스를 휘저을수록 커서와 목표 지점 사이에 있는 공간을 마우스로는 절대로 뛰어넘지 못한다는 답답함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으니까. 숙원이 아직 숙원으로 남아있을 때, 그러니까 타이프라이터가 아직 수명을 다하지 않았을 때의 우리집 마루에서 떠올리는 ‘내 개인 컴퓨터’처럼, 커서의 시작점과 도착점이 유난히도 멀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으니까. 도스에서는 타이핑 몇번이면 끝났을 텐데, 이 먼 픽셀의 길을 에누리 없이 가야 한다니 피곤했다.

그런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단축키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암기할 수 있는 단축키가 늘어났다. 지금 나오면 아무도 구매하지 않을 것 같은 ‘초보들을 위한 윈도 95’ 책을 사서도 결국 단축키 지식만 불렸다. 프로그램 별로도 단축키는 얼마든지 있었다. 친구들이 표를 마우스로 또각또각 그리고 있을 때 나는 단축키 몇 개로 해결했다. 마우스의 수명이 다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성기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 나는 더 키보드와 친해졌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타이핑을 익혀야 컴퓨터를 사준다는 부모님의 약속은 어디까지를 내다본 것이었을까. 아무튼 난 두 분의 숙원을 이루고 또 이루는 효자였다. 마우스의 속박으로부터 난 편리를 쟁취했다. 그것도 그 어렵던 키보드를 통해.

그 윈도는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픽 기반 체제라는 점에서는 윈도나 다름 없는 맥OS도 떵떵거리고 있다. 도스는 잊혀진 지 오래다.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젊은 세대들 중 도스라는 단어를 아예 못 들어본 사람도 많다. ‘도스 아세요?’라고 물으면 ‘디도스요?’라는 반문이 나올 것만 같다. 하지만 이들이 진짜 ‘디지털 네이티브’일까? 사실은 많은 경우 ‘윈도 네이티브’가 아닐까? 심지어 이제는 마우스로 하는 탐색을 넘어 터치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져 있는데, 그래서 단축키조차 잘 쓰지 않을 텐데, ‘스마트폰 네이티브’인 것은 아닐까? 타자도 칠 줄 알고 마우스도 움직일 수도 있고 터치도 자유자재로 쓰지만, 정말로 디지털 기술을 잘 다루고는 있을까? 어쩌면 윈도와 맥OS 바깥에 있는 사이버 공간이나 디지털 기능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저 MS와 애플이 정해준 테두리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인데, 그건 ‘MS 네이티브’나 ‘애플 네이티브’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물론 필자가 쓰던 도스도 MS 도스였다…) 

마우스에 한창 익숙해질 무렵 느꼈던 그 피곤함이 가끔씩 떠오를 때가 있다. 그 피곤함이 키보드 위에서 조금씩 해소됐을 때의 상쾌함도 같이 감각된다. 그럴 때면 너무나 당연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각종 디지털 기술들에 아무런 불편함이나 의아함 없이 지나는 하루를 경계한다. 신뢰하던 검색엔진이 퍼올려주는 결과들을 난 의심했었던가, 인공지능이 주저없이 내놓는 답들의 근거를 난 되물었던가, 그들이 공짜로 주는 것 같은 서비스에 사실은 개인정보나 민감 정보 등 각종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걸 난 굳이 잊으려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숙원해 왔던 ‘편리’가, 스스로의 쟁취로 이뤄졌던가, 아니면 뭔가의 수명 다함으로 인해 저절로 수취됐던가. 난 의심한다. 부러 불편해 하려 한다.

by 문가용 기자(anotherphase@thetechedge.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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